커피와/추출

커핑(Cupping)에도 농도와 수율이 있다

Coffee Explorer 2020. 4. 2. 02:21

커피를 조금은 더 객관적인 환경 속에서 맛보기 위한 커핑(Cupping),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약속과 규정이 있습니다. SCA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물과 원두의 비율에서부터 커핑하는 공간의 크기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에 대한 가이드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커피 추출에 관여하는 조건에는 물과 원두의 비율, 커핑 용기의 규격, 추출수의 수질과 수온, 분쇄도, 로스팅 등이 있죠.

 

커핑에서의 온도 그리고 커핑볼

실내온도 26℃에서 커핑 시 용기에 담긴 현탁액의 온도 변화

높은 온도의 물을 부어서 긴 시간을 추출하지만, 긴 추출 시간을 탓하며 커피 맛이 쓰다고 하지는 않죠. 바로 여기에는 커핑볼의 재질과 두께가 만들어내는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실온의 커핑볼에 원두를 담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커핑 용기 안에 담긴 현탁액은 짧은 시간 동안 높은 온도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3분을 넘어서면서 추출력이 많이 약해지는 80℃ 전후의 온도로 내려오고, 이후에도 지속해서 하강합니다.

 

정확한 재질의 규정은 없지만, 커핑에서 의외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은 커핑 용기입니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커핑 용기는 많은 열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온도의 물을 부어도 커핑 초기에는 높은 온도의 현탁액이 만들어졌다가, 식어가게 됩니다. 반대로 두꺼운 용기의 세라믹 커핑 용기는 더 낮은 온도의 현탁액을 만들게 됩니다.

 

두꺼운 세라믹 커핑볼은 조금 더 낮은 추출력을 갖게 한다면, 반대로 얇은 유리컵은 조금 더 강한 추출력을 가집니다. 수치로서의 큰 차이는 아닐 수 있지만, 커피의 섬세한 뉘앙스에는 어느 정도 차이를 만들어서 맛에 예민한 테이스터라면 차이를 변별하게 됩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세리믹 커핑볼과 얇은 유리컵에서는 맛이 다를 수 있습니다.

 

커핑에도 농도와 수율이 있다

혹시 우리가 하는 일반적인 커핑에서는 어느 정도의 농도와 수율로 커피가 만들어지는지 알고 계시는가요? 다양한 커핑을 참여하다 보면 적정한 농도와 수율의 상태로 커핑을 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적정하지 않은 상태로 진행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농도와 수율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감안하고 맛을 보면 되지 않냐"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미각이라는 것에 미치는 여러 요소와 효과를 고려해볼 때, 혼란을 줄이기 위해 애초에 적정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맞습니다. 약간의 온도와 농도 차이는 맛 인지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요인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브루잉 컨트롤 차트를 통해서 적정한 농도와 수율을 기준을 제시하는 SCA가 커핑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농도/수율을 측정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VST사의 CoffeeTools 어플리케이션을 보면 커핑 모드를 지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측정 수치와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서 적정한 커핑의 농도/수율을 공유하다 보면, 대략 적정한 범위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브루잉 커피의 농도와 수율과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추정하기 쉽습니다만, 제 세팅에서 결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측정 시점과 방식에 최소한의 기준은 필요할 텐데, 제 경우에는 물을 부은 지 20분 후에 필터링한 커피 용액을 측정했습니다. 결과는 TDS 1.10-1.25%, EXT 21.3-24.3% 정도의 수치가 나왔습니다.(하리오 정품 필터 VCF-01-40W 를 이용해서 걸러낸 후 측정, VST 굴절계용 필터 사용 시 0.03 정도 낮게 측정됨)

 

커핑은 브루잉 커피 추출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1:18 정도의 브루 레이쇼(Brew Ratio)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것은 곧 추출에 더 많은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브루잉보다는 더 높은 수율로 추출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은 더 엄격한 기준 속에서 맛을 볼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분쇄도와 커핑

커핑의 환경에서 다른 부분에 비해 비교적 잘 지켜지지 않는 조건을 하나 꼽자면, 바로 분쇄도가 아닌가 합니다. SCA 커핑에서 분쇄도의 기준은 US 20사이즈의 매쉬(mesh, 채)를 70-75%가 통과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문제는 절대다수가 해당 매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자의적인 판단으로 분쇄도를 사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라인더의 종류에 따라서 US 20사이즈의 매쉬(mesh, 채)를 70-75% 통과한다고 할지라도, 가령 특정 크기의 미분이 많다든지 입자 분포에는 차이가 납니다. 지금 당장 그라인더를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쇄도를 적정하게 조절하는 것은 손쉽게 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현실적으로 커핑에서의 농도와 수율을 가장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분쇄도이기 때문에 충분히 깊은 고민 끝에 결정하셔야 합니다.

 

정리하며

커핑의 구글 검색 이미지

물론 그 외에도 다양한 요소가 커핑에서 맛에 영향을 줍니다. 여러 명이 커핑하며 커피의 양이 빠르게 줄어들 때는 온도 역시 더 빠르게 하강하겠죠. 맛이 있어서 양이 많이 줄어든 커피의 온도는 더 빠르게 내려가고, 맛에서도 더 다르게 느껴집니다. 사용한 커핑 스푼의 두께나 실내 온도, 커핑 참여자들의 습관(뜨거운 물에 린스를 얼마나 자주 하는지 등) 역시 영향을 주는 요소일 겁니다.

 

단순하게만 보이는 커핑인데, 이를 둘러싼 변수를 모니터링 하다 보면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분명 같은 커피인데 오늘 이 커핑에서는 왜 너무나 다르게 느껴지는 것인지 미스터리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인은 어디엔가 있기 마련이죠.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내가 몰랐던 것을 하나 알고 나면, 조금은 더 커피가 보입니다. 오늘의 커핑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